허허, 산바람이 제법 선선해졌군요. 굽이굽이 험한 산길을 오르느라 참으로 고생 많으셨습니다. 바쁜 걸음 잠시 멈추고 짐을 내려놓으시지요. 이 늙은 산승과 마주 앉아 갓 끓여낸 따뜻한 작설차나 한잔 나누고 가시길 바랍니다. 찻잔 위로 피어오르는 하얀 김이 허공으로 흩어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오늘 그대가 물어온 깊고도 무거운 질문에 대한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볼까 합니다.

오늘 그대가 묻는 제2의 부처, 용수보살(龍樹菩薩, Nāgārjuna)의 『중론(中論)』은, 무려 이천 년이 가까운 세월 동안 수많은 수행자들의 뼈를 깎는 번뇌를 단숨에 베어낸 매섭고도 자비로운 지혜의 보검(寶劍)입니다. 이 논서는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고 지식을 뽐내기 위한 학문적 텍스트가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며 매일같이 겪는 억울함, 살을 에는 듯한 상실감,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 그리고 타인을 향한 맹렬한 분노의 뿌리를 근원적으로 뽑아내는, 참으로 절절하고도 깊은 생명 해방의 이치가 그 안에 담겨 있지요.

복잡하고 어지러운 학문적 용어와 번쇄한 철학적 논증은 이 산사(山寺)의 마당 한구석에 다 내려놓으시지요. 그저 흙냄새 나는 우리네 팍팍한 삶의 이야기로, 피와 땀이 흐르는 진정성 있는 언어로 이 웅장한 가르침의 진수를 다시금 길어 올려 보겠습니다.

용수보살(龍樹菩薩, Nāgārjuna)

1. 무명(無明)의 늪 : 우리가 짊어진 괴로움의 진짜 이유

그대여, 우리는 왜 이토록 매일 괴로움 속에서 허덕이는 것일까요? 왜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면 가슴이 찢어지듯 아프고,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밤잠을 설치며 괴로워하는 것일까요? 용수보살께서는 그 모든 괴로움의 밑바닥에 ‘착각(顚倒)’이 똬리를 틀고 있다고 일갈하십니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나(我)’라는 존재가 이 우주 한가운데 굳건히, 변함없이, 홀로 존재한다고 맹신합니다. 내 육신, 내 생각, 내 감정이 영원히 변치 않는 실체라고 굳게 믿지요. 나아가 내 눈앞에 펼쳐진 저 산과 강, 내가 소유한 재물, 내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 심지어 나를 짓누르는 근심과 걱정조차도 변함없이 꽉 막힌 ‘실체(實體)’라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용수보살께서는 단호히, 그리고 자비롭게 고개를 저으십니다.

“세상 그 어떤 것도 스스로의 성질을 가지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 네가 굳게 쥐고 있는 그 ‘나’라는 것조차 실은 신기루와 같다.”

우리는 끊임없이 변해가는 흐름 속의 한 점을 붙잡고 “이것이 영원해야 한다”, “이것은 온전히 내 것이다”라고 억지를 부립니다. 흘러가는 강물을 두 손으로 움켜쥐려 하니 물은 손가락 사이로 다 빠져나가고, 남은 것은 허탈함과 분노뿐입니다. 이처럼 변하는 것을 변하지 않는다고 믿고,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이라 우기는 어리석음, 그것이 바로 우리의 영혼을 갉아먹는 무명(無明)입니다.

2. 얽힘 속에 피어나는 생명의 교향곡, 연기(緣起)

이러한 무명의 어둠을 찢고 들어오는 찬란한 지혜의 빛이 바로 연기(緣起, Pratītyasamutpāda)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숱한 인연(因緣)이 모여 잠시 일어난 것일 뿐, 홀로 독단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가만히 저 연못 위에 피어난 맑고 투명한 연꽃 한 송이를 보시지요. 우리는 흔히 저 꽃을 가리켜 “연꽃이 있다”라고 말하며, 연꽃이라는 고정된 실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혜의 눈으로 들여다보면 어떠합니까? 저 아름다운 꽃은 어느 날 허공에서 마술처럼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있던 작은 씨앗(因)이 있었습니다. 그 씨앗을 품어준 캄캄하고 끈적한 진흙, 하늘에서 내려온 따사로운 햇빛과 부드러운 바람, 촉촉한 물의 흐름, 심지어 곁을 스쳐 간 이름 모를 벌레들의 날갯짓까지… 이 우주적인 무수한 조건(緣)들이 기적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닿은 바로 그 찰나에, 잠시 ‘연꽃’이라는 현상으로 피어난 것뿐입니다.

만약 볕이 영영 사라지거나 물이 말라버린다면, 진흙이 메말라 굳어버린다면 저 꽃은 피어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연꽃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의 도움을 빌려 잠시 그 모습을 나투고 있는 것입니다.

그대의 삶 또한 이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대가 지금 겪고 있는 그 견딜 수 없는 슬픔도,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벅찬 기쁨도 결코 그대 혼자서 만들어낸 고립된 사건이 아닙니다. 과거의 무수한 선택들, 타인과의 얽히고설킨 관계, 시대적 배경과 우연한 사건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지금 이 순간의 ‘나’와 ‘나의 상황’을 직조해 낸 것입니다. 모든 것이 서로에게 기대어 존재한다는 이 장엄한 그물망, 이것이 중론의 뼈대인 연기입니다.

내가 우주와 철저히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지독한 외로움과 고립감에서 벗어나 온 생명과 숨을 고르게 쉴 수 있습니다.

3. 텅 빈 충만, 절대적 자유의 공간 공(空)

연기의 이치를 철저히 깨닫게 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중론의 심장인 공(空, Śūnyatā)의 세계로 들어서게 됩니다.

꽃 스스로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고유하고 독립적인 성질, 즉 ‘자성(自性)’이 없기에 꽃은 비로소 인연 따라 피고 또 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스스로 존재하는 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것, 모든 것이 인연 따라 임시로 모인 형상일 뿐 그 본질은 텅 비어있다는 것이 바로 공(空)입니다. 용수보살은 이를 “연기하기 때문에 공한 것이다(緣起卽空)”라고 갈파하셨습니다.

불자여, 수많은 이들이 이 공(空)이라는 단어 앞에서 절망하고 오해하곤 합니다. “모든 것이 비어있고 실체가 없다면, 내가 열심히 살아가는 이 삶은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결국 다 허무하고 부질없는 짓이 아닌가?”라며 공(空)을 ‘아무것도 없는 칠흑 같은 무(無)’나 ‘염세적인 허무주의’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이 늙은 승려는 단언컨대, 참된 공(空)은 결코 죽음의 허무가 아니라 펄떡이는 생명의 찬가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생각해 보시지요. 만약 새하얀 도화지에 이미 지워지지 않는 검은 먹물이 가득 칠해져 있다면(실체가 있다면), 우리는 그곳에 단 하나의 아름다운 풍경도 새로 그릴 수 없을 것입니다. 도화지가 텅 비어있기에(空), 비로소 붉은 노을도 그리고 푸른 바다도 그릴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방 안에 온갖 잡동사니가 꽉 차서 옴짝달싹할 틈조차 없다면 그 방은 쉴 수 있는 공간이 아닙니다. 방이 비어있기에 그대가 지친 몸을 뉘어 편히 쉴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고정불변하는 ‘나’라는 실체가 없기에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화를 내는 ‘나’가 영원한 실체가 아니기에 나는 자비로운 사람으로 변할 수 있고, 지금 겪는 이 끔찍한 고통에도 실체가 없기에 우리는 그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비어있기에 비로소 우주의 모든 가능성이 열리는 것입니다. 공(空)은 닫힌 결말이 아니라, 무한한 자유를 향해 끝없이 열려있는 창문과 같습니다.

4. 분별망상을 베는 여덟 가지 부정, 팔불중도(八不中道)

용수보살께서는 우리가 가진 어리석은 집착을 철저히 부수기 위해, 여덟 가지 날카로운 부정을 통해 세상의 실상을 설명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팔불중도(八不中道)입니다. 마음을 다잡고 이 여덟 가지 부정을 가만히 음미해 보시길 바랍니다.

  • 불생불멸(不生不滅) : 본래 새로 생겨나는 것도 없고, 아주 없어지는 것도 없다.

  • 불상부단(不常不斷) : 영원히 지속되는 것도 없고, 아주 끊어져 단절되는 것도 없다.

  • 불일불이(不一不異) : 절대적으로 같은 것도 없고, 절대적으로 다른 것도 없다.

  • 불래불출(不來不出) : 어디선가 오는 것도 없고, 어디론가 가는 것도 없다.

우리는 누군가가 태어나면 “생겨났다(生)”며 기뻐하고, 누군가 죽으면 “사라졌다(滅)”며 통곡합니다. 하지만 연기의 관점에서 보면, 물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다시 수증기가 되듯 그저 인연에 따라 형태가 바뀔 뿐, 우주의 관점에서 새롭게 추가되거나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이분법적인 잣대로 세상을 난도질합니다. ‘너와 나’, ‘선과 악’, ‘생과 사’, ‘행복과 불행’. 그러나 용수보살께서는 이 여덟 가지 부정을 통해 우리가 만들어낸 그 모든 언어와 개념, 흑백논리의 틀(희론, 戱論)을 산산조각 내버리십니다. 개념과 분별이 끊어진 자리, 그 절대적인 침묵과 평화의 자리가 바로 우리가 돌아가야 할 본래의 고향입니다.

5. 양극단의 벼랑에서 내려온 절대 평화, 중도(中道)

그렇다면 깨달은 자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는 것일까요? 모든 것이 공(空)하다 하여 산속에 숨어 돌덩이처럼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잠시 인연 따라 모였다 흩어지는 물거품 같은 것들을 향해 “이것은 영원할 것이다”라고 움켜쥐는 것을 상견(常見)이라 하고, “어차피 다 사라질 것이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라며 허무에 빠지는 것을 단견(斷見)이라 합니다.

‘있다(有)’는 맹목적인 집착에 빠지면 무언가를 잃을까 봐 평생을 전전긍긍하며 두려움 속에 살아야 하고, ‘없다(無)’는 차가운 허무에 빠지면 삶의 의미와 책임감을 모두 잃고 우울이라는 늪에 빠져버립니다. 용수보살께서는 이 두 가지 극단의 벼랑 끝에서 당장 내려오라고 사자후를 토하십니다.

있음에 집착하지도, 없음에 절망하지도 않는 그 고요하고 치우침 없는 시선. 그것이 바로 중도(中道, Madhyamā-pratipad)입니다.

그대여, 오해하지 마십시오. 중도는 이것과 저것을 적당히 섞어놓은 회색빛 타협이나, 눈치를 보며 중간을 걷는 기회주의가 아닙니다. 중도는 양극단의 환상을 철저히 꿰뚫어 보고 분별을 내려놓은 뒤,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인연의 소중함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껴안는 가장 적극적이고 지혜로운 삶의 태도입니다.

모든 것이 텅 비어있음(空)을 알기에 집착 없이 온전히 사랑할 수 있고, 모든 것이 연기(緣起)하여 연결되어 있음을 알기에 타인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여기며 한없는 자비(慈悲)를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머물거나 집착하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것(응무소주 이생기심, 應無所住 而生其心), 이것이 바로 중도를 걷는 보살의 거룩한 삶입니다.

6. 일상 속에서 써먹는 지혜의 칼 :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으라

자, 그렇다면 이 깊은 철학을 우리의 남루한 일상으로 가져와 봅시다. 우리는 매일 출근을 하고, 사람들과 부대끼며, 상처 주고 상처 받으며 살아갑니다. 이 진흙탕 같은 사바세계(娑婆世界)에서 중론의 가르침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할까요?

누군가 그대에게 비수를 꽂는 모욕적인 말을 던져 가슴속에 시뻘건 화가 치밀어 오른다고 가정해 봅시다. 과거의 그대라면 그 ‘화’라는 감정을 ‘나’와 동일시하여 “내가 화가 났다! 저 인간을 어떻게든 갚아주겠다!”며 분노의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중론의 지혜를 빌려 그 감정을 가만히 해부해 보시지요. 그 화는 어디서 온 것입니까? 저 사람의 거친 입술(緣)과 내 마음속에 남아있던 열등감이나 인정욕구(因)가 부딪혀 아주 잠시 ‘분노’라는 불꽃이 튀어 오른 것뿐입니다. 그 분노에는 고정된 실체(자성)가 없습니다. 실체가 없는 도깨비불 같은 감정에 ‘나’라는 주인을 앉혀두고 스스로 영혼을 태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 저 사람의 말과 내 마음의 조건이 만나 지금 ‘화’라는 감정이 잠시 일어났구나. 하지만 이것은 인연 따라 생겨난 것이니, 인연이 다하면 이내 흩어질 빈 껍데기(空)에 불과하구나.”

이렇게 한 걸음 물러서서 관조(觀照)하는 순간, 그토록 거대해 보이던 분노의 불길은 땔감을 잃고 스르르 꺼져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공(空)의 지혜가 일상에서 발휘되는 기적입니다.

슬픔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이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그 인연이 영원해야 한다는 착각 때문입니다. 만남이 있으면 반드시 헤어짐이 있는 것(회자정리, 會者定離)이 연기의 법칙입니다. 슬퍼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껏 슬퍼하되, 그 슬픔에 먹혀버려 자신의 삶마저 파괴하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대여, 찻물이 어느새 다 식어가는군요. 기나긴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어 참으로 고맙습니다.

바람이 불면 그저 바람을 맞으시지요. 비가 오면 피하려 발버둥 치지 말고 시원하게 비를 맞으시지요. 억지로 붙잡으려 애쓰지 않으면 잃을 것도 없고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매 순간 다가오는 내 주변의 사람들과 인연에 내 온 마음을 다해 정성을 쏟으십시오. 사랑할 수 있을 때 아낌없이 사랑하고, 일할 수 있을 때 뜨겁게 땀 흘리십시오. 그러나 그 결과가 영원히 내 뜻대로 되어야만 한다는 집착의 밧줄로 스스로의 영혼을 묶어두지는 마십시오.

마음속에 무겁게 짊어지고 온 그 과거의 후회와 미래의 불안, 그 ‘나’라는 짐을 잠시 이 툇마루 바닥에 완전히 내려놓고, 그저 맑은 산공기를 들이마시며 고요히 숨 한 번 깊게 쉬어 보시길 바랍니다.

모든 것이 텅 비어있으나 모든 것으로 충만한 그 맑은 마음 자리, 분별이 끊어진 그 절대적인 평화의 자리에, 이미 온 우주의 따뜻한 위로와 자유가 온전히 깃들어 있습니다.

그대의 앞길에 걸림 없는 자유가 함께하기를, 지극한 마음으로 두 손 모아 발원합니다. 성불(成佛)하십시오.

[이 늙은 산승의 물음] 세상의 이치를 머리로는 이해할지라도, 막상 가슴을 치는 현실의 문제 앞에서는 여전히 마음이 요동치기 마련입니다. 지금 그대의 마음을 가장 무겁게 짓누르고 있어, ‘공(空)’의 지혜로 시원하게 베어내고 싶은 집착이나 고민이 있다면 어떠한 것인지요?<script async src=”https://pagead2.googlesyndication.com/pagead/js/adsbygoogle.js?client=ca-pub-2727475949396840&#8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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